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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기'로서의 그리기
​- 손현선 개인전 <눈 숨 새> 리뷰

1.

그림은 반복되는 운동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회전 또는 공전. 어떤 것을 축으로 두고 그 주변을 각각의 속도로 더듬으며 지나가는 시작도 끝도 없는 운동, 그것을 회화로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그 운동을 흉내 내듯 빠른 붓질로 캔버스를 훑거나, 운동의 여러 찰나들을 동시에 담거나, 또는 자신의 시각이 이동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듯 대상을 분할한다. 납득이 되는 그림들이다. 모든 것에 각자의 속도가 있으니 그 차이를 감지해 내기 위해 오래 들여다 보고, 자신의 몸으로 그 속도를 담아 보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철학적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에 수긍할 수 있었고, 회전운동이 작가에게 불편하게 다가왔을 순간도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었다. 시간의 지배를 받는 모든 물질의 운동이 불가역적이라 믿던 작가에게 몇 초 마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레미콘의 마크와 쉴 새 없이 제자리만 맴도는 실링 팬 (fan) 의 모습은 균열로 인지될 수밖에 없었을 테니, 작가는 그 기괴한 운동이 이해 될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낯선 운동들이 담긴 그림들은 전시장 내의 정주행하던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잠시 방해하거나 틈을 내는 또 다른 운동들로 변환되어 있었다. 전시장은 각각의 그림에 의해 파열되고 갈라져 진동했으며 나는 또 다른 운동으로서 그 사이를 다시 헤집었다. 그러나 거기에 도착하였다는 생각이 든 순간, 나는 반드시 경유해야 할 곳을 들르지 않고 종착지에 다다른 느낌이 들었다. 전시장에는 레미콘의 회전 뿐 만이 아니라 그것의 초상이 걸려있었고, 입구에는 다만 '들숨'과 '날숨'의 반복 운동이라 여기기에는 석연찮은, 나를 찌르듯 쳐다보는 낯선 인물의 초상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찜찜함을 해소하기 위해 나는 그것들로부터 시선을 떼어 작가에게로 옮겨야했다. 작가는 끈질긴 바라봄을 통해 대상의 운동을 인지하면서도 감각 보다는 감정 이라는 표현을 선호했다. 감각은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띄는 반면 감정은 개별적이다. 건조하게 대상을 탐색하는 듯했던 작가의 시선과 그것을 그리는 작가의 손 사이에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그림의 과정이 반사신경적인 것이 아니며 오랜 시간을 두고 대상을 바라보며 그것이 자신의 신체에 담궈졌을 때야 비로소 다시 내뿜을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신체를 오랜 시간 경유한 그림들은 작가의 감정이 덧대어 분출될 수 밖에 없기에, 작가는 그것을 '감정'이라 표현하는 것일테다. 그러니 내가 경유하여 오래도록 머물렀어야 하는 곳은 아마도 작가의 신체일 것이다. 결국 그의 그림을 통해 발견해야 하는 것은 보편적 지식의 재발견/재창조가 아닌 대상과 '손현선' 이라는 신체의 마주침에서 발생했을 고유의 '정서'인 것이다. 정서는 공유된 감각을 기반으로 소통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러한 소통은 알 듯 말 듯 하거나 전혀 알 수 없는 각자의 감정까지 생성하기 때문에 수천가지의 변주가 가능하다.1), 2) 궤도를 슬그머니 탈주하면서도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는 리토르넬로3) 처럼. 

 

2. 

장률 감독의 영화, <춘몽 (A Quiet Dream, 2016)> 에는 수색역의 이 편 그러니까 아직 개발되지 않은 지역에 사는 네 명의 젊은이가 등장한다. 그 중 예리라는 인물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굴다리를 지나 수색역의 이 편과 저 편, 그러니까 뉴타운으로 이미 개발되어 디지털 미디어 시티와 상암 MBC, 수많은 오피스텔과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는 곳을 일주일에 한 번씩 오간다. 예리를 동시에 사랑하는 나머지 세 사내들은 저 편을 바라보며 '저 곳은 왠지 정이 안간다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이 편도 빨리 재개발되어 땅값이 오르길 기다린다. 영화는 그들의 일상과 뜬금없는 – 예리가 느닷없이 춤을 춘다든지 인물들이 갑자기 사라진다든지 하는 - 장면을 교차시키고 애매한 조도 (照度)로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지리멸렬한 현실과 몽환적 꿈을 뒤섞이게 한다. 

작가가 그린 레미콘은 작가의 작업실 맞은편 공사장을 들락날락 하던 것으로 수색역의 저편에 이어 이 편에까지 불어 온 재개발 바람과 함께 등장한 것이었다. 예리처럼 '우리 그냥 이렇게 살자'를 외칠 듯 한 작가에게, 오래 쌓여 만들어진 것이 빠르게 사라져 거대한 무엇이 그 위를 덮쳐버리는 현장은 작가의 깊은 몸 속 어느 곳을 찔러댔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에 꿈틀대는 것은 다만 내장들이었을 뿐 작가는 레미콘의 오묘한 회전에 자신의 의식을 맡긴다. 레미콘 마크의 요철은 작가에게 달의 표면을 상기시키고 몸체의 회전은 다른 사물들의 감각들을 불러내었으며 레미콘 뒤의 장막은 출렁이는 삼색의 이미지로 작가의 뇌신경과 후두엽 사이를 오갔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그 사이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현실의 모서리를 다시 발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막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레미콘의 운전석에는 누가 있는지, 저 장소는 이제 어떻게 될 것인지. 작가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대상의 운동들과 그 사이로 파고드는 현실감각들을 구획해내기 위한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대상과 스스로를 동질화하면서 감정을 배제할 수 없게 되었으리라.

그러한 동질화는 작가의 몸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불편한 것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작가는 이미 대상과의 동일시, 즉 신체를 통한 '-되기'를 시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 그 바라봄은 운동의 이질감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운동기구나 실링팬 시리즈처럼), 작가가 원하는 삶의 양상들과 다른 어떤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감정적 불편함 (레미콘 시리즈) 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그것들은 오래

바라보기부터 시작해 운동 흉내내기4), 그것과 동일하게 반응하기 등으로 변화하면서 작가와 대상 사이에서 꿈처럼 떠돌던 감각을 실존하게 한다. 다시 말해 작가는 대상들이 우리와 공존하고 있는 교란들임을 그의 신체를 통해 증명한다. 이때 꿈은 현실과 교차하느 ㄴ것이 아니라 공존한다.

 

수색역의 이 편에 작업실이 저 편에 집이 있는 손현선은 영화 속의 예리처럼 굴다리를 오간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굴다리를 오가는 것 역시 자신의 무의식을 체화하는 '-되기''의 한 방법이다. 그것은 순행과 역행을 통해 어떤 변화를 주체적으로 감지하는 것이며, 그로부터 발생된 작가의 의식들을 몸과 함께 사유하는 것이다 이때의 ’-되기' 는 사물이나 동식물, 또는 사람이 아닌 사회적 변화를 체화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작가가 보았을 레미콘 차의 움직임과 그것을 옮긴 초상들은 실링팬이나 운동기구와 같은 회전운동 시리즈에서 벗어난다. 그것은 사회정책에 따라 이 쪽과 저쪽으로 나뉘어 갈라지는 삶의 모습들, 그리고 서서히 무언가로 인해 잠식되는 현장을 예민하게 감각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며 그로 인해 변화하는 작가 자신을 드러낸 것이다.

 

 

3.

작가는 자신을 불편하게 했던 환풍기의 운동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그것을 흉내내었고, 레미콘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그것에 자신의 감정을 투사했으며, 타인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그와 함께 숨을 쉬었다. 그 타인의 얼굴을 그린 것이 전시장의 입구에서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는 초상화 <어떤 남자> 다 그로부터 발생된 '-되기'는 다른 그림들과는 다른 강도(剛度)를 갖고 있다. 작가는 인간의 기계적 운동을 보여주고자 자신의 감정을 싣지 않을 수 있을 타인의 이미지를 고르고 숨을 제외한 다른 것들 - 감정이나 표정 –을 배제하기 위해 오로지 숨만 쉬는 어떤 사람을 옮겨 담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죽음과 근접한 사람의 무표정은 무엇보다도 수많은 것을 담고 있었고, 보다 적극적으로 ‘-되기'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숨을 쉬는 것은 동시에 내뱉고 들이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날숨을 마시고 숨을 불어 그가 들이쉬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죽음을 함께 경험하는 것이었지만 자의적인 선택일 수 없는 것이었다. 권력의 기표인, 백인 남성의 모습을 한 남자는, 손현선의 그림 속에서 겨우 숨만 들이쉬고 내쉰다. 그 남자의 허공을 향한 응시는 자신의 존엄에 대해 묻는다. 게다가 그가 아직 떨치지 못한 권력의 기표들과 죽음의 기표들은 보는 이에게 강력하게 무엇인가를 요청한다. 전시장 전반을 무겁게 누르는 이 요청은 그의 숨을 상상하기도 전에 나에게 여러 감정들을 파생시켰다. 나는 사내의 눈으로부터 떠올려진 여타의 사건들과 장면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을 외면해 온 것에 대한 자책에 휩싸이거나 그것이 과잉된 나르시즘은 아닌지 자조하게 되었다. 그 감정의 교차는 매우 빠르게, 또는 동시에 일어나 소란을 일으켰다. 이를 예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 그림을 전시에 끼워 넣은 것은 그것이 발생시키는 다른 사유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인가? 레미콘의 회전이 작가에게 현실로의 복귀를 강제했다면 사내의 요청은 작가에게 또 무엇을 강제하는가? 작가는 이 사내를 통해 어떤 되기 를 시도하는가? 어쩌면 작가는 전시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지 모르겠다.

한 때 완전한 기계가 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은 아마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각주

1) <눈 숨 새>라는 전시명 역시 작가의 눈, 대상의 숨, 그 둘이 마주치는 찰나로 한정하여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작가의 눈이자 대상의 눈, 또는 관람자의 눈이며, 그 모든 이(것)들의 숨이고 작가가 그것들을 마주했던 찰나부터 관객이 그림을 마주했던 모든 찰나를 의미한다.

2) 보편을 기반으로 개별을 생성한다 그 둘은 말끔하게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명확하게 전달되거나 공유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일시정지의 순간을 만들어내며 각각의 찰나를 만든다.

3) 리토르넬로 (Ritournello): 교향곡의 반복되며 변주되는 구간을 뜻한다 가타리는 자신의 저서 <카오스모제>에서 리토르넬로 개념을 통해 주체성의 구성요소에 대해 설명한다. 주체성은 개별적이고 일관되지 않은 비논리적 다양성을 보이지만 동시에 통일된 감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점은 논리와 비논리 개인과 사회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반대되거나 대립하는 것이 아니며 서로를 침투하며 공존해 있음을 드러낸다. 본문에서는 주체성과 관련하여 리토르넬로 를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바라보는 아날로그 방식의 운동이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접점에 있으며 또 그것을 자신의 신체에 담아 관객에게 전달하는 작가의 감정 역시 그 접점에 있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인용하였

다.

4) 작가는 실제로 그리는 대상의 움직임을 따라해 보기도 한다고 언급했다 그것을 녹화하여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그 움직임을 따라해 보기도 하고 그 대상이 갖고 있을 레이어들을 한겹 한겹 그리는 방식으로 운동과 존재 자체를 사유하며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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